1790년, 조선 최후의 르네상스와 드리워진 그림자
조선 후기, 개혁과 문화 부흥의 정점
1790년, 조선은 제22대 국왕 정조(正祖)의 통치 아래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상처를 딛고 일어선 민족의 저력이 빛을 발하던 때였습니다. 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탕평책을 계승하여 붕당 간의 대립을 완화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특히 학문과 문화를 진흥시키기 위해 설립한 규장각(奎章閣)은 단순한 도서관을 넘어,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모여 국가 정책을 연구하고 새로운 사상을 논하는 개혁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시기, 경제적으로는 상공업이 발달하며 새로운 부유층이 등장했고, 전국적으로 장시(場市)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력이 증대되었으나, 동시에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농민들도 늘어나면서 사회 내부의 양극화 또한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1790년은 바로 이러한 안정과 변화의 기운이 공존하던, 폭풍전야와도 같은 해였습니다. 바로 그 해 6월, 훗날 순조(純祖)가 되는 왕자(원자)가 태어나면서 왕실에는 경사가 깃들었지만, 이는 동시에 조선의 운명을 뒤바꿀 거대한 변화의 서막이기도 했습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즉위 직후 정조가 신하들에게 던진 이 한마디는, 그의 통치 철학과 강력한 개혁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새로운 사상과의 충돌: 서학(西學)과 신해박해의 전운
18세기 조선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전통적인 외교 틀 속에서 청나라, 일본과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정기적인 사신 파견을 통해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교류했지만, 백성들의 삶에 더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공식적인 외교 창구가 아닌 다른 경로로 들어온 '서학(西學)'이었습니다. 천문학, 지리학, 수학 등 서양의 과학 기술과 함께 전래된 천주교는 조선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성리학적 세계관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인간은 모두 신 앞에 평등하다'는 교리와 조상의 제사를 우상 숭배로 규정하는 태도는 신분 질서와 효(孝)를 중시하던 조선 지배층에게는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790년 무렵,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서학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며 신자들의 공동체가 점차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서학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취하며, 사상적인 문제로 치부하려 했으나, 보수적인 노론 벽파(僻派) 세력의 반발은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1년 뒤인 1791년, 조선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해박해(辛亥迫害)'로 폭발하게 됩니다.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 사건'이 빌미가 되어, 새로운 사상을 향한 국가의 칼날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교과서 밖 이야기: 문체반정(文體反正)과 지식인들의 고뇌
정조 시대의 또 다른 흥미로운 이면은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지적 논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새로운 문체, 즉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하고 사실적인 글쓰기를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하고, 고전적인 문체로 돌아갈 것을 강제한 일종의 '문체 개혁 운동'이었습니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북학파의 거두인 연암 박지원(朴趾源)과 그의 역작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있었습니다. 정조는 박지원의 글이 담고 있는 실용적인 사상과 내용은 높이 평가했지만, 그 파격적인 문체가 사대부들의 정신을 어지럽히고 사회 기강을 해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단순히 글쓰기 스타일의 문제를 넘어, 새로운 시대정신과 전통적 가치관이 충돌하는 양상이었습니다. 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흐트러진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 서학의 확산과 같은 급진적인 사상적 흐름을 통제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글이란 도(道)를 담는 그릇이다." - 문체반정을 통해 정조가 강조하고자 했던 핵심은, 문장이 단지 기교의 산물이 아니라 올바른 정신과 가치를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1790년은 겉으로는 태평성대를 누리는 듯했지만, 그 이면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여러 갈등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정조라는 위대한 군주의 강력한 통제력 아래 수면 밑에 있던 문제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19세기 세도정치라는 긴 암흑기를 거치며 조선의 운명을 뿌리부터 뒤흔들게 됩니다. 한 시대의 절정과 새로운 시대의 불안을 동시에 품고 있던 1790년의 역사는, 위기와 기회가 어떻게 공존하며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가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한 페이지라 할 수 있습니다.
1790년 전후 주요 사건
연도 | 사건 | 설명 |
---|---|---|
1776년 | 정조 즉위 및 규장각 설치 | 정조가 왕위에 올라 개혁 정치를 시작하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과 정책 연구의 중심으로 삼음. |
1785년 | 을사추조적발사건 | 김범우의 집에서 열린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이 발각된 사건으로, 서학 문제가 공론화되는 계기가 됨. |
1790년 | 순조(원자) 탄생 | 정조의 둘째 아들이자 훗날 제23대 왕 순조가 되는 원자가 태어남. |
1791년 | 신해박해 (진산 사건) |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 권상연이 조상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으로, 조선 최초의 천주교 박해가 발생함. |
1792년 | 문체반정 시작 | 정조가 당시 유행하던 패관소품(稗官小品)체의 문장을 비판하며 고문(古文)으로 돌아갈 것을 명함. |
1796년 | 수원 화성(華城) 완공 | 정조의 왕권 강화와 국방력 증진, 상업 중심지 육성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축조된 계획도시이자 성곽. |
1800년 | 정조 승하 및 순조 즉위 | 개혁 군주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며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세도정치가 시작됨. |
```